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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유상철 감독, 당신의 투혼을 기억하리라

by 남자의 속마음 202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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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바랐건만 끝내 돌아오지 못 했다.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을 말한다. 투병 끝에 7일 숨졌다. 향년 50세. 너무 일찍 갔다. 그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그라운드를 누비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듬직한 선수였다. 4강 신화의 주역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마침내 눈을 감았다. 모범적인 생활로 귀감이 됐던 선수다.

그는 투병 중에도 벤치를 지켰다. 인천의 2부 리그 강등을 막아내기도 했다. 죽어도 그라운드에서 죽겠다는 각오였다.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지휘봉을 내려놓고 투병에 전념해왔다. 운동장에 나와 간간이 얼굴을 비춰주기도 했다. 지난해 5월에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한일 월드컵 당시 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나와 훈훈한 감동을 선사했다.

유상철은 현역 시절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였다. 그는 울산 현대와 요코하마 마리노스(일본), 가시와 레이솔(일본)을 거치며 12년간 프로 생활을 한 뒤 2006년 울산에서 은퇴했다. 청소년 대표와 올림픽 대표, 국가대표 등 연령별 대표팀을 두루 지냈으며 한일 월드컵에서는 히딩크호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4강 신화 작성에 앞장섰다. A매치(국가대표팀간 경기) 기록은 124경기 18골이다.

유상철은 2019년 5월 프로축구 인천의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그 해 11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그럼에도 시즌 종료까지 팀을 이끌며 K리그1(1부) 최하위(12위)에 있던 팀을 부임 5개월 만에 10위까지 끌어올렸다. K리그 강등을 막고, 1부리그 잔류라는 임무를 완수했다. 시즌이 끝난 2019년 12월에야 치료에 들어갔다. 그만큼 책임감이 강했던 것이다.

그는 항암 치료와 방송 활동을 병행하면서 재기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기도 했다. 지난해 6월 항암 치료 13회를 마쳤고 같은 해 9월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결과 암세포가 거의 사라졌다는 소견도 들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고 통원 치료 대신 입원해 집중 치료를 했지만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유상철은 우리나라 축구 역사상 유례없는 멀티플레이어로 꼽힌다. 월드컵 4강의 주역으로 홍명보 울산 감독과 함께 2002 월드컵 공식 BEST11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건국대를 졸업한 뒤 1994년 프로에 입단했다. 1999년에는 요코하마 F 마리노스를 통해 일본 J리그에 진출하면서 활약했다. 다시 국내로 돌아와 2006년 자신의 친정 팀인 울산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우리병원에 다니셨다. 직원이라 찐팬이란 말 한마디 못했는데. 오실 때마다 항상 웃으며 말해줘서 너무 좋았는데. 당신은 나의 진정한 레전드였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좋은 곳에 가셔서 아프시지 말고 편히 쉬세요~. 2002년 감독님 덕분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국가장으로 치르자. 그럴 자격 충분히 있다.” 팬들은 이처럼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멋지게 살다 가셨다. 고인의 영면을 빈다. 그대는 영웅이다.

#오풍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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