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 안녕하십니까?
가족 모두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원칙이 통하는 세상- 요원한가? 라는 글을 잘 읽었습니다.
공감 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누굴 원망하리요? 라는 글에서............
‘지난 12월 1일 서울신문에 블로그를 개설했습니다.
처음 간판은 '기자와 성경 읽기', 이후 '사람 사는 맛'으로 바꿨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독자(?)분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간판을 생각했지요.
그러나 성경은 딱딱합니다.
저 또한 끝가지 읽는 데 인내심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것을 네티즌들께 강요(?)하는 게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독자 분께도 양해를 구했습니다. ‘
충분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딱딱해서 끝가지 읽는 데
인내심을 필요로 하셨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노력을 하면서까지 읽어주시니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보내드리는 내용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칙이 통하는 세상- 요원한가?
압제, 불공평, 정실 등은 이 세상에서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뒤틀려진 수많은 일들은 간단히 바로 잡혀질 수 없고,
인간사의 그릇된 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고대의 가장 지혜로웠던 통치자들 중 한 사람인 ‘솔로몬’ 왕은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전도 1:15.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정의감으로 인해, 부정직하고 하나님이나 동료 인간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외견상 성공하는 것을 보고 매우 슬퍼합니다. 기타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히브리’ 예언자 ‘하박국’과 같이,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시는가?’ 하고 질문합니다.―하박국 1:2-4
불의한 일을 겪어 오면서 너무나도 마음이 교란되었기 때문에 일부 하나님의 종들은 바르게 사는 것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인가 하고 심각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다윗’ 왕의 통치 때 살던 유명한 ‘레위’ 음악인 ‘아삽’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공개적인 숭배에서 여러 세기 동안 사용되었던 노래를 지은 인물입니다. (역대 하 29:30) 음악에 맞추어 부르는 그들의 가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대한 소식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아삽’은 크게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 중 얼마 동안, 그는 영적으로 중대한 위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영감 받은 노래 중 하나인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다음과 같이 실토 하였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 였[었노라].” ―2절.
‘아삽’은 자신의 균형을 깨뜨리게끔 영향을 미친 어떠한 일을 보았습니까? 그 대답이 시편 73:3-9에 있습니다.
‘아삽’은 악인들이 번영하는 것을 보고 그의 속에서 시기심이 끓어올랐습니다. 사악한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수단으로 긁어모은 부에 대하여 자랑하였습니다.그들이 불법을 자행하는데도 그들에게는 만사가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외면상으로는 그들이 평화와 안전을 누리고 있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사실, 그들의 악한 생활 방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생명은 무서운 죽음의 고통도 없이 평온하게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식이 풍부하였으며, 그들의 눈은 영양실조로 퀭하게 들어가기는커녕 ‘살이 쪄서 솟아났습니다.’ 그들은 수치감도 없이 악한 길을 계속 갔습니다. 그들의 거만 또는 교만은 “목걸이”와 같이 그들에게 장식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수한 폭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폭행을 옷처럼 걸쳤습니다.’ 항상 그들은 폭력으로 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의 불의한 꾀가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쳤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우쭐해져서 자기들의 부정한 행위를 “거만히”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나 땅에 있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혀는 굴레가 씌워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입은 혀가 내키는 대로 토해냈습니다.
분명히, ‘아삽’이 목격한 그러한 일로 인해 불리한 영향을 받게 된 사람은 ‘아삽’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시 73:10, 11 악인들이 그들의 불법을 통해 이득을 얻는 것같이 보이는 그 행로를 생각하면, 의인들의 마음은 매우 교란됩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그들의 머리 속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자꾸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마치 그들이 독약을 탄 음료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묵과하실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계시지 않는가?’ 하고 질문을 합니다.
자기의 상태와 악인들의 번영하는 상태를 비교해 보고, ‘아삽’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 책 을 보았도다.” -시 73:12-14 그리하여 이 시편 필자는 사실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 헛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악인들은 번영을 누리는 데 반해 자기는 계속 재앙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자기를 시정하시고 책망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무수한 악행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 ‘아삽’은 자기가 그런 생각에 빠지는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 이런 투로 말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가족을 배반하는 것이 되도다. 그래서 내가 이 점을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나로서는 너무 어려워 그 대답을 구할 수 없도다.” (시 73:15, 16, 신 영성) 그렇습니다. 시편 필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한 자기의 견해가 실상은 충실한 사람들에 대하여 자기가 불충실하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그런 의심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침식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삽’은 자기의 생각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의로운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는데 악인들은 어찌해서 그들의 악행으로 이득을 보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편 필자는 자기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삽’은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모여 있는 숭배자들 가운데서, 그는 악인들 앞에 어떠한 일이 닥치게 될 것인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시 73:17) ‘아삽’은 어떠한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 하시 리이다.” ―시 73:18-20.
시편 필자의 이 말은 불경건한 제도의 불공평을 견디도록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중요한 점을 알려 줍니다. 악인들이 번영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은 단지 일시적입니다. 그들의 생활은 오직 없어질 수 있는 물질적 소유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미끄러운 곳”에 서있는 것이며, 갑작스럽게,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채 무시무시한 파멸을 당할 위험을 항상 안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에 가서 그들이 늙어 사망이 그들에게 임할 때, 그들이 부당하게 얻은 이득은 그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시 49:6-12) 그들의 번영은 신속히 지나가 버리는 일장춘몽과 같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늙기 오래 전에 그들 위에 공의가 시행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의 법칙이 그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 든 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 6:7)
그러므로 , 공평과 불법과 압제가 번창하는 것같이 보이는 때에, 우리는 악인들이 정말로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발생하고 있는 일들을 유의하고 계시며, 자신의 웅대한 목적과 일치한 결과를 산출하시기 위해 사물들을 허용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징벌을 당하기에 마땅한 자들에게 공의가 집행되는 것이 상당히 긴 기간이 걸리는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 임 이니 이다.” (시 90:4) 오늘의 우리에게 어제는 얼마나 길게 느껴집니까? 아마 시련 속에서 하루를 보낸 일이 있었다면, 그 날이 결코 끝날 것 같지 않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날은 끝났으며, 그 날은 거의 없었던 것과 같지 않습니까? 창조주께는 천년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즉 네 시간 길이의 밤의 한 경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겨우 70 내지 80년 밖에 안 되는 인간의 수명은 사실상 하나님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 하 였 나이다” 하고 예언자 ‘모세’는 말하였습니다. (시 90:9) 그렇습니다. 우리의 짧은 수명은 우리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번의 호흡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충성스러운 종들에게 평화롭고 안전하게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고려할 때, 일생을 고통 속에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견해는 불의와 압제와 불공평을 직면해 나아가는 데 당하는 고통을 참도록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제도 내에서 보게 되는 불공평이 우리의 마음을 교란시킬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중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 나아감으로써 성공적으로 그 짐을 견딜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상은 매우 크기 때문에, 비교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직면하게 될 어떠한 시련이나 환난도 “잠시”에 불과할 것입니다.―고린도 후 4:17.
원칙이 통하는 세상이 ‘잠시’ 후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대로........ 거기에는 의가 깃들여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둘째 3:13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한 독자분에게서 어제 받은 메일 입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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